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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신문 2011 신춘문예-희곡 당선작] 아빠들의 소꿉놀이/오세혁

[서울신문 2011 신춘문예-희곡 당선작] 아빠들의 소꿉놀이/오세혁

입력 2011-01-03 00:00
업데이트 2011-01-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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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

꾸부정 지금 막 해고된 초보 해고자. 40대 후반. 키 크고 꾸부정하다.

대머리 해고된 지 1년이 넘은 베테랑 해고자. 40대 후반. 키 작고 대머리다.

단발 꾸부정의 아내. 40대 초반

파마 대머리의 아내. 40대 중반

*연출에 따라 남편들이 부인들의 역할을 겸하는 2인극이 가능하다.

●시 간

현대

●무 대

놀이터. 놀이터를 구체적으로 꾸밀 필요는 없다. 그네 두 개만으로도 연출이 가능하다. 바닥에 모래가 깔려 있으면 좋다.

#1

해가 질 무렵의 저녁, 놀이터.

양복 차림의 남자가 힘없이 놀이터로 걸어 들어온다. 고개를 푹 숙이고 꾸부정한 모습으로 보아 무언가 고민이 있는 듯하다. 꾸부정한 이 남자, 그네에 주저앉는다. 멍하니 한참을 앉아 있다가 무언가 결심한 듯, 벌떡 일어난다.

꾸부정 (어색하게) 여…… 여보…

… 나 오늘, 해, 해, 해고…….

고개를 흔들며 그네에 주저앉는다. 그러다가, 다시 벌떡 일어난다.

꾸부정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여보, 훌쩍, 나 오늘 해고당했어.

머리통을 때리며 그네에 주저앉는다. 그러다가, 다시 벌떡 일어난다.

꾸부정 (호탕하게 웃으며) 사랑하는 여보! 나! 오늘 짤렸어! 멋지지? 하하하!

머리를 쥐어뜯으며 주저앉는다. 한참을 그렇게 쥐어뜯다가, 무언가 결심한 듯, 결연히 일어나 열정적인 독백을 시작한다. 꾸부정이 열심히 말하는 동안, 양복 차림의 대머리가 천천히 걸어 들어와 옆에 있는 그네에 앉아 시계를 들여다본다. 자기 상상에 빠진 꾸부정은 대머리를 눈치채지 못한다.

꾸부정 여보. 우리가 결혼한 지 이십 년이 넘었구나. 단칸방으로 시작해서 전세를 거쳐서 우리 집을 갖기까지 오랜 세월이 걸렸어. 비록 평수는 작지만 우리 집이라는 게 중요하지. 애들도 건강하게 잘 컸어. 얼마 안 있으면 큰애는 대학에, 작은애는 고등학교에 가겠지. 이 정도면 우린 잘 산 거야 그렇지? 당신, 그동안 정말 고생 많았어. 아니? 뭐라고? 내가 제일 고생 많았다고? 십오 년을 변함없이 회사에 다녀주어서 고맙다고? 때론 가기 싫기도 하고 피곤하기도 했을 텐데 가족을 위해서 고생하는 모습이 안쓰러웠다고? 아이, 당신도 참 부끄럽게…… 뭐라고? 이제 나이도 먹고 간도 안 좋을 텐데 생각 같아서는 한 몇 년 푹 쉬었으면 좋겠다고? 이럴 수가, 당신이 나를 이렇게까지 생각해주다니! 정말 고마워 여보! 하하하하……말이 나와서 말인데 여보……사실……내가……오늘……회사에서.

대머리 (불쑥) 소용없을 겁니다.

꾸부정 (화들짝)네 넷? (돌아본다) 아니, 언제부터 거기?

대머리 죄송하군요. 들으려고 들은 건 아닙니다만.

꾸부정 괘 괜찮습니다. 그런데 방금……소용없다고…….

대머리 (단호) 네, 소용없습니다. 불쌍하게 말하든 호탕하게 말하든 부드럽게 말하든 소용없습니다. 해고라는 단어가 입에서 나오는 순간 부인께서는 엄청난 쇼크를 받으실 겁니다. 부인이 아무리 건강한 사람이라도 휘청거리거나 털썩 주저앉거나 뒤로 넘어가게 될 겁니다. 부인이 건강하신가요?

꾸부정 아……아니요, 혈압이 조금.

대머리 혈압이라, 뒤로 넘어가겠군.

꾸부정 새……생각해보니 골다공증도.

대머리 뒤로 넘어져서 뼈가 부러지겠군.

꾸부정 얼마 전부턴 심장이 답답하다고.

대머리 뒤로 넘어져서 뼈가 부러진 다음 호흡 곤란을 일으키겠군.

꾸부정 뭐……뭐라구요!

대머리 집이 몇 층이죠?

꾸부정 시……십오층인데?

대머리 완벽하군요. 해고라는 말을 꺼내는 순간 선생의 부인은 혈압이 높아져서 뒤로 넘어지고 골다공증으로 뼈가 부러진 다음, 심장 이상으로 호흡 곤란을 일으킬 겁니다. 놀란 선생은 어떻게든 해보려 하지만 방법이 없습니다. 혈압과 뼈와 심장이 동시에 문제를 일으켰거든요. 우물쭈물하다가 선생님은 119에 전화를 하겠죠. 119 요원들은 잽싸게 아파트에 도착하지만 선생님의 집은 십오층입니다. 마침 엘리베이터가 맨 꼭대기 층에 있군요. 요원들이 계단을 뛰어올라 옵니다. 일층 이층 삼층 사층 선생의 부인은 점점 호흡이 가빠집니다. 오층 육층 칠층 더더욱 가빠집니다. 팔층 구층 부인의 의식이 점점 없어집니다. 십층 십일층 선생이 말합니다. 여보, 조금만 참아. 십이층 십삼층 선생이 다시 한 번 말합니다. 여보, 제발 조금만 더 참아. 그렇게 십사층을 지나고 십오층에 도착해 마침내 선생의 집으로 왔을 때 선생의 부인은 이미…….

꾸부정 (이야기에 몰입해 있다가)아……안 돼! 안 돼! 여보오!

꾸부정, 털썩 쓰러진다.

대머리 그렇다고 말을 안 할 수는 없겠죠. 해고는 해고니까요. 이왕이면 부인의 컨디션이 최상일 때, 119가 바로 올 수 있는, 뒤로 넘어가도 뼈가 부러지지 않을만한 장소에서 하시죠. 부드러운 모래라든가……이 놀이터가 딱이로군요. (다시 그네에 앉아 시계를 들여다본다)

한참의 정적.

꾸부정 어떻게…… 어떻게 그렇게 잘 아시죠?

대머리 사실 저도 해고잡니다.

꾸부정 동업자…… 아니…… 동반자셨군요.

대머리 벌써 1년이 넘었습니다.

꾸부정 고참…… 이시네요. 혹시……선생님 부인께서도 뒤로?

대머리 아니요.

꾸부정 뼈가?

대머리 전혀.

꾸부정 호흡 곤란이라든가.

대머리 천만에요. 멀쩡합니다. 멀쩡함을 넘어 건강하죠. 김치찌개에다 밥을 두 그릇이나 비운 다음, 남은 찌개를 밥통에 넣고 비벼먹으니까요.

꾸부정 ……대단하군요. 대체……비결이…….

대머리 간단합니다. 해고됐단 얘기를 안했으니까요.

꾸부정 그, 그럼?

대머리 계속 다니는 줄 압니다.

꾸부정 아니 그게 일 년 넘게 가능한가요?

대머리 보통 사람은 불가능합니다.

꾸부정 하지만 선생님은?

대머리 전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자랑은 아니지만 어릴 때부터 영특, 기특,똑똑, 비범이란 말을 달고 다녔으니까요. 한마디로 머리가 좋았죠.

꾸부정 (대머리의 머리를 한참 쳐다본다)

대머리 지금, 대머리 주제에 머리가 좋아봤자 얼마나 좋을까라고 생각하셨죠?

꾸부정 그……그럴 리가.

대머리 어쨌든, 저 정도의 두뇌라면 충분히 속이는 게 가능합니다. 분명한 원칙 규칙 법칙만 확립한다면 말이죠. (시계를 가리키며) 이 시계도 그런 원칙 중의 하납니다. 퇴근시간 여섯시, 전철 타고 내리면 여섯시 삼십분, 역 앞에서 버스 타고 동네까지 오면 여섯시 오십분, 동네에서 아파트까지 오는 데 여섯시 오십오분, 아파트에서 우리 집까지 오면 딱 일곱시, 그렇지만 시간을 너무 딱 맞춰 오면 이상하니까 적당하게 일곱시 삼분 정도……마침 지금이 일곱시 삼분이군요. 더 늦으면 어색합니다. 그럼 이만.

대머리, 일어나서 가려고 한다.

꾸부정 (벌떡 일어나며) 자……잠시만요.

대머리 …….

꾸부정 저한테도 그……원칙 규칙 법칙을 가르쳐 주시면 안 될까요?

대머리 (위아래로 훑어보며) 딱 보니 보통 사람이시군요. 불가능합니다.

꾸부정 (앞을 막아서며) 부탁드립니다.

대머리 일반인이 범접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닙니다.

꾸부정 스승님으로 모시겠습니다.

대머리 미안합니다. 늦으면 의심합니다. (가려고 한다)

꾸부정 (바짓가랑이에 매달리며) 제발요, 제발. 이렇게 빕니다. 우리 집사람이 뒤로 넘어가고 뼈가 부러지고 호흡곤란을 일으키는 건 상상만 해도 끔찍합니다. 그 사람은 저 같이 별 볼일 없는 사람이랑……결혼을 해준 사람이에요. 그 사람이 그렇게 되는 건 절대 안 됩니다. 조금이라도, 일분일초라도 더 웃게 해주고 싶습니다. (무릎 꿇으며) 허락하실 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겠습니다.

무릎 꿇은 꾸부정을 계속해서 지켜보는 대머리. 꾸부정, 점점 다리가 저려온다.

대머리 다리 저리죠?

꾸부정 ……조금.

대머리 이쯤 되면 좀 봐주지 저 대머리 진짜 독한 놈이다,라고 생각하셨죠?

꾸부정 그……그럴 리가요?

대머리 다리 저리면, 꼼지락하세요.

꾸부정 아……아닙니다. 약속은 약속이니까.

대머리 괜찮습니다. 꼼지락하세요.

꾸부정 그럼……조금만 꼼지락을.

꾸부정, 슬며시 꼼지락거린다.

대머리 (시계를 들여다본다) 시간이 꽤 지났군요. 어중간한 시간입니다. 지금 들어가면 뭔가 부조리합니다. 이럴 때는 회식을 한 것처럼 아예 늦게 들어가는 게 좋은 방법이죠. (전화를 건다) 나야, 별일 없지? 부장님이 딱 한잔만 하자고 하시네. 당신도 알잖아 부장님이 회사일 힘들면 나한테 털어놓는 거. 일찍 갈 테니까 밥은 먼저 먹어. (전화 끊자마자 가방에서 반병 정도 남은 소주를 꺼내 한 모금 마신다) 회식이라고 했기 때문에 입에서 술 냄새가 나야 됩니다. (오징어 다리를 꺼내 우물우물 씹는다) 술 냄새만 나면 이상하니까요. 자, 그럼, 훈련을 시작해 볼까요?

꾸부정 (기쁨) 저……정말이십니까?

대머리 시간이 없으니까 3단계로 요약 학습을 하죠. 정신 똑바로 차리세요.

꾸부정 (차렷 자세로) 옛!

대머리 가장 중요한 1단계는, 변화입니다.

꾸부정 변화?

대머리 많은 해고자들이 그 사실을 숨기려고 하지만 대부분 들킵니다. 왜일까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어떠한 행동의 변화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한숨을 쉰다든가, 소파에 푹 주저앉는다든가, 밥 먹다가 숟가락을 멈추고 한참을 멍하니 있는다든가, 밤이 깊도록 식탁에서 소주를 마신다든가, 아들한테 사립대 말고 국립대로 가는 건 어떠냐고 한다든가, 잠자리에서 등을 돌린 후 웅크리고 잔다든가, 자다가 자기도 모르게 흐느낀다든가. 이런 변화들이 해고를 들키는 가장 큰 이유죠.

꾸부정 (감탄) 그렇군요.

대머리 변화되지 않는 것. 일상적인 평범함을 유지하는 것. 이게 가장 중요합니다.

꾸부정 (감탄의 연속) 으음…….

대머리 이론만 가지고는 감이 안 옵니다. 실전훈련을 해보죠. 이 놀이터가 집이고 제가 부인이라고 설정을 해봅시다. 선생은 회사 일을 마치고 막 퇴근한 상탭니다. 바깥에서 벨을 눌러보세요. (꾸부정이 멍하니 있자) 시간 없습니다. 빨리.

꾸부정 (얼떨결에) 예…… 옛! (바깥으로 달려 나가) 띵동!

대머리 (부인 흉내) 당신 왔어? 밥은?

꾸부정 (대머리를 한참 바라보다가) 풉…….

대머리 …….

꾸부정 그게……집사람이 대머리라고 생각을 하니까 너무 웃겨서…….

대머리 …….

꾸부정 죄……죄송합니다. 제대로 하겠습니다. 띵동!

대머리 당신 왔어? 밥은?

꾸부정 아, 먹었어.

대머리 (손을 잡으며) 고생 많았지?

꾸부정 …… 흐흑. (흐느낀다)

대머리 뭡니까? 왜 울죠?

꾸부정 (흐느끼며) 집사람이 손을 잡아주니까 갑자기 미안하고, 고생만 시킨 것 같고, 젖은 손이 애처롭고…….

대머리 어허, 이러니까 들키는 겁니다. 마음을 강하게 먹으세요. 돌부처처럼!

꾸부정 네……넷! 돌부처! 다시 하겠습니다. 띵동!

대머리 당신 왔어? 밥은?

꾸부정 (과장되게) 밥? 먹었지! 아주 많이!

대머리 (손을 잡으며) 별일은 없었어?

꾸부정 (더더욱 과장되게) 별일은 무슨, 평소랑 또오오옥 같았어 하하하하!

대머리 잠깐, 왜 이렇게 들떠 있죠? 회사에서 좋은 일이 있었나요?

꾸부정 아니요.

대머리 월급날입니까?

꾸부정 아니요.

대머리 부인 생일인가요?

꾸부정 아니요……별일 없었는데

대머리 그런데 왜 그렇게 오버를 합니까? 별일 없었는데 그렇게 오버 하면서 별일 없었다고 하니까 마치 별일이 있는 것처럼 보이잖아요?

꾸부정 아……거기까지는 차마.

대머리 자, 눈을 감으세요. 상상을 해봅시다.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평범하고 반복적인 회사의 하루, 위에서 눌리고 밑에서 치이고 정리해고의 소문이 뒤숭숭하게 들려오고, 선생은 그 틈바구니에서 간신히 하루를 버티고 퇴근을 합니다. 지하철이 붐빕니다. 버스가 막힙니다. 심신이 지쳐있습니다. 터덜터덜 걸어옵니다. 그 상황에서 초인종을 누릅니다. 띵동! (부인 목소리) 당신 왔어? 별일 없었지?

꾸부정 (상상하다가 정말 지친 듯, 무심하게) 뭐, 똑같지 뭐.

대머리 나이스! 그겁니다! 하니까 되잖아요?

꾸부정 아? 정말? 정말 되네?

환호하는 꾸부정. 대견한 듯 지켜보는 대머리.

대머리 (느닷없이) 당신 왔어? 별일은?

꾸부정 (재빨리) 뭐, 똑같지 뭐.

하이파이브

대머리 당신 왔어? 별일은?

꾸부정 (능숙하게) 뭐, 똑같지 뭐.

하이파이브

대머리 당신 왔어? 별일은?

꾸부정 (완전 능숙) 뭐, 똑같지 뭐.

엄지손가락을 치켜드는 대머리.

대머리를 부둥켜 안는 꾸부정.

암전. 암전을 감싸는 작은 멜로디.

#2

불이 켜지면 꾸부정이 초조한 듯 그네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다. 이상하게도 잠옷 차림. 그의 발밑에 수북이 쌓인 담배꽁초들. 대머리가 체육복 가방을 들고 놀이터로 들어온다. 그네에 타고 있는 꾸부정을 의식 못한 채 양복바지와 윗도리를 벗는다. 아아, 그 속에 입고 있는 축구 유니폼.

대머리 (부인에게 전화하는 듯) 나야. 사내 축구대회가 이제 끝났어. 오늘은 두골밖에 못 넣었어. 부장님은 후보였지 뭐. 밥?……부장님이 같이 먹자고는 했는데…… 정 그렇다면 집에서 먹지 뭐. 금방 갈게.

전화를 끊고, 곧바로 모래밭에 뒹굴며 유니폼을 더럽히는 대머리. 만족한 듯 어깨를 으쓱거리며 주위를 둘러보다가 꾸부정을 발견하고는 놀란다.

대머리 뭐……뭡니까?

꾸부정 오랜만……입니다 스승님.

대머리가 꾸부정을 잡아채어 그네 밑으로 숨는다.(숨어질 리가 없으니 웃기다)

대머리 오랜만? 헤어진 지 하루 만에 만났는데 오랜만이라구요?

꾸부정 오랜만은……아니네요.

대머리 이 놀이터는 제가 찜했으니까 다른 놀이터에서 시간을 때우라고 몇 번을 말했습니까?

꾸부정 그건……알지만.

대머리 대체, 40대의 못생긴 남자 둘이 놀이터 그네에 앉아 있다는 게 주민들이 봤을 때 얼마나 평범하지 않은 일인지 모르시는 겁니까?

꾸부정 …….

대머리 방금, 솔직히 이 대머리보다는 내가 더 잘생겼는데 라고 생각하셨죠?

꾸부정 그……그럴 리가.

대머리 (쌓여있는 담배를 본다) 맙소사, 이 아까운 담배. 이 담배값이면 김밥이 두 줄이거늘…… 왜 이런 비행을 일삼는 겁니까? 혹시…… 걸린 겁니까?

꾸부정 …….

대머리 세상에, 하루 만에 걸리다니……시키는 대로 안 했죠?

꾸부정 아…… 아닙니다. 배운 그대로 하려고 했어요. 그런데……변수가 있었어요.

대머리 변수라니요?

꾸부정 스승님께 배운 1단계를 계속 되뇌면서, 심호흡을 하고, 현관문을 여는 순간.

대머리 순간?

꾸부정 첫째 둘째가 쪼르륵 달려오더라구요. 그러고는 갑자기…….

대머리 갑자기?

꾸부정 아빠 생일을 축하한다면서 첫째 놈이 어깨를 주무르고 둘째 놈이 노래를 부르는 거예요.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이러면서 .(갑자기 목이 멘다)

대머리 세상에……본인 생일인지도 몰랐나요?

꾸부정 저는 집사람이랑 애들이랑 부모님이랑 장인 장모랑 부장님 상무님 전무님 사장님 생일밖에 모릅니다.

대머리 …….

꾸부정 자식들이 생일노래를 불러주는데 어떤 아빠가 목이 안 멥니까. (흐느낀다)

대머리 잠깐, 이상하군요. 선생 말대로 대한민국의 모든 아빠들은 자녀들이 생일을 챙겨줄 때 웁니다. 자녀들의 생일 축하에 감동한 아버지가 고개를 돌리고 조용히 운다. 이건 튀는 게 아닌데? 평범한 건데?

꾸부정 조용히 운 게 아니라……. (갑자기 바닥에 뒹굴며 통곡한다)

대머리 음 ……그렇게 울었군요.

꾸부정 (끄덕이며 계속 통곡)

대머리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나 할 법한 울음을 생일 축하를 받는 자리에서.

꾸부정 (더 크게 통곡)

대머리 가족들은 가장의 뜬금없는 대성통곡에 당황했을 테고.

꾸부정 (그야말로 대성통곡)

대머리 그래서……그 다음 행동은?

꾸부정 갑자기 부끄러워져서…… 도망치듯 안방으로 들어왔습니다.

대머리 도망치듯 이라, 이런.

꾸부정 그러고는 저도 모르게 안방 문을 잠그고.

대머리 맙소사.

꾸부정 밖에서 두들겨도 열어주지 않다가 .

대머리 하느님.

꾸부정 눈을 떠보니 아침이더군요.

대머리 ……부인은?

꾸부정 ……거실에서.

대머리 …….

꾸부정 눈을 뜨자마자 너무 당황스러워서……몰래 집을 나왔습니다.

대머리 씻지도 않고, 드라이도 안 하고, 더군다나……잠옷 차림.

꾸부정 공원에 계속 숨어 있다가 시간 맞춰서 나온 겁니다. 스승님…… 저 어쩌죠?

대머리 일반인이 범접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라고 그렇게 얘기했거늘.

꾸부정, 흐느낀다. 대머리, 눈을 감은 채 한참을 말없이 서 있다가 천천히 축구 유니폼을 벗는다. 속옷 차림으로, 꾸부정에게 축구 유니폼을 건네는 대머리.

대머리 회사원인 남자가, 씻지도 않고 드라이도 안 하고 나왔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그러나 체육대회를 했다면 알리바이가 생기죠. 입으세요.

꾸부정 ……하지만……스승님도…….

대머리 저는…… 심판 봤다고 하겠습니다. (가방에서 호루라기를 꺼내 목에 걸며) 이건……다음 달에 쓸 거였는데…….

꾸부정 이 은혜……잊지 않겠습니다. 스승님.

대머리 들어가자마자 아버님 사진을 꺼내세요. 꺼내자마자 사진 부여잡고 우세요. 어제 선생은, 돌아가신 아버님 때문에 울었던 겁니다.

꾸부정 (경이로움) 과연……스승님은…….

대머리 이제, 뒹구세요!

꾸부정, 열심히 모래바닥에 몸을 뒹군다.

암전. 암전을 감싸는 작은 멜로디.

#3

불이 켜지면 단발머리를 한 여성이 놀이터에 서 있다. 그녀는 양손에 커다란 가방을 들고 있다.

단발 (냉랭하게) 여보, 솔직히 말 안 하면 나, 집 나갈 거야…… 짤렸지?

그네 위에 주저앉는다. 다시 벌떡 일어난다.

단발 (울먹이며) 당신 나 죽는 꼴 보고 싶어? 빨리 말해? 짤렸지?

그네 위에 주저앉는다. 다시 벌떡 일어난다.

단발 (화통하게) 호호호호! 괜찮아 여보! 딱 보니까, 짤렸네? 호호호호!!

힘없이 주저앉는 단발머리.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다가 천천히 일어나 차분하게 독백을 시작한다. 단발머리가 독백을 하는 동안 파마머리를 한 여성이 조용히 들어온다. 그러고는 옆 그네에 앉아 벼룩신문을 보기 시작한다.

단발 (이성적으로) 여보, 나 당신과 지금까지 함께 했고 앞으로도 함께할 거야. 당신도 알겠지만 우린 부부야. 부부가 뭔데? 비밀이 없는 게 부부야. 내가 열을 셀 동안 당신이 끝까지 비밀을 말 안 해준다면 나……집 나갈 거야. 이게 당신의 마지막 기회야. (눈을 감고) 하나, 둘, 셋, 넷…….

파마 (불쑥) 대답 안 할 거예요.

단발 (화들짝) 네 넷?

파마 그쪽 아저씨한테 짤렸냐고 추궁해도 대답 안 할거라구요.

단발 …….

파마 오히려 추궁하면 추궁할수록 그쪽 아저씨는 위험해질 거예요.

단발 위험해……진다구요?

파마 남편 성격이?

단발 조금……소심해요.

파마 소심하다라……열을 세자마자 바로 집을 뛰쳐나가겠네.

단발 약간 다혈질이기도.

파마 다혈질이라……바로 옥상으로 올라가서 뛰어내릴 수도 있겠네.

단발 조금 고전적인 면도.

파마 고전적이라……고전적으로 약국마다 돌면서 수면제를 살 수도 있겠네.

단발머리, 비틀거리다가 그네에 주저앉는다.

파마 너무 걱정하진 말아요. 뛰쳐나가면 잡으면 되고 옥상 문은 잠가놓으면 되고 약 먹어도 응급실이 있으니까. 그래도……상처는 남겠죠. 돈 없어도 살지만 자존심 없으면 못사는 게 남자니까. (일어나며)그럼 이만.

단발 저……저기…….

파마 …….

단발 어떻게……그렇게……잘…….

파마 우리 아저씨도 짤렸거든요. 그것도 1년째.

단발 그쪽 아저씨가 혹시……뛰쳐나가셨나요?

파마 전혀.

단발 혹시 옥상에서?

파마 전혀.

단발 혹시 약을?

파마 전혀, 1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아요. 건조하고, 재미없고, 대머리고.

단발 그게 어떻게 …… 가능하죠?

파마 모르는 척 했거든요, 해고당한 걸.

단발 모르는 척……그게……그렇게 쉽게…….

파마 평범한 주부들은 안 돼요. 어느 정도 비범해야만 가능하죠.(시계 본다)늦었네요. 잠시 후면 우리 아저씨가 이 놀이터로 올 거예요. 항상 여기 들렀다가 시간을 맞춰서 퇴근한 척하거든요.

파마머리, 벼룩시장을 챙겨서 집으로 걸어가는데.

단발 사모님!

파마 …….

단발 저도……저도 비범하게 만들어주시면 안 될까요?

파마 일반 주부가 범접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에요. (다시 걸음을 옮기는데)

단발 (무릎 꿇으며) 부탁이에요, 사모님. 저희 남편이 때때로 소심하고 때때로 한심하고 때때로 답답하기는 하지만……좋은 사람이에요. 오로지 집이랑 애들이랑 저밖에 모르는……그 사람이 옥상으로 올라가거나 약을 사러 돌아다니는 건 상상만 해도 끔찍해요. 그 사람이 계속해서 맘 편히 집으로 오게 만들어주고 싶어요. (무릎 꿇으며) 부탁드려요!

한동안의 정적.

파마 제자로 받아주면……가끔 소금 설탕 간장 같은 거 빌려줄 수 있어요?

단발 그럼요!

파마 맛있는 반찬 하면 나눠줄 수도 있고?

단발 그럼요!

파마 그쪽 애들 통닭이나 피자 시켜주면 우리 애들도 불러 먹일 수 있고?

단발 그럼요!

파마 좋은 마음가짐이에요. 제자님이 그렇게 해주면 나도 제자님한테 그렇게 해주겠어요. 서로 서로 나눔으로써 감소된 경제력을 최대한 이겨내는 거예요.

단발 방금, 제자라고?

파마 그래요. 제자로 받아주겠어요.

단발 (큰절) 스승님!

파마 (대머리에게 전화하는 것일까) 여보, 퇴근하는 중이지? 미안한데 올 때 계란 좀 사다줘요. 동네 슈퍼 말고 꼭 유기농 파는 데로 가서, 그래 큰길가에 있는, 고마워요. (전화 끊는다) 우리 아저씨가 놀이터로 오는 시간을 지연시킨 거예요. 수업을 해야 하니까

단발 그런 깊은 뜻이! 그럼 저도 전화할까요?

파마 비싼 거 말고, 계란이나 당근처럼, 싸면서도 깐깐하게 골라야 하는 걸로, 그래야 남편에게 부담이 안 가면서 시간도 벌어지니까.

단발, 꾸부정에게 열심히 전화한다. 파마, 대견하게 지켜본다. 통화가 끝나고 본격적으로 수업에 들어가는 두 사람.

파마 상태 체크부터 해보죠. 그쪽 아저씨가 해고당했을 거라는 판단을 하게 된 이유는?

단발 그게……집에 왔을 때만 해도 평소랑 똑같았어요. 별일 없었냐고 물어보니까.

파마 “뭐, 똑같지 뭐.” 라고 했죠?

단발 (놀란다) 그걸 어떻게?

파마 그게 1단계니까요.

단발 그런데 그날이……남편 생일이었거든요. 그래서 애들이 노래를 불러줬어요. 그런데.

파마 그쪽 아저씨가 한참을 가만있다가 대성통곡을 한 거죠?

단발 맞아요!

파마 그러다 울먹이면서 안방으로 뛰쳐들어갔을 테고.

단발 맞아요!

파마 문을 잠가놓고 밤새 안 열어주다가 다음 날 아침에 잠옷 바람으로 나갔는데 들어올 때는 축구 유니폼을 입고 들어오더니 아버님 사진을 꺼내놓고 울지는 않던가요?

단발 맞아요! 그것도 멀쩡히 살아계신 아버님을……. (흐느낀다)

파마 분석을 해보니, 짤린 지 일주일쯤 되었을 때 나오는 증상이네요. 지금이 가장 위험할 때에요. 걸릴까 말까 말할까 말까 집에 들어올까 말까를 가장 고민할 때죠.

단발 그……그러면……어떻게?

파마 제자님이 실력을 발휘할 때인 거예요 일명 ‘모른 척’의 실력을.

단발 모른 척의 실력?

파마 생각해봐요. 남편들이 “아, 걸릴지도 모르겠구나.”라는 생각을 언제 하게 될까요?

단발 글쎄…….

파마 바로 ‘눈빛’이에요.

단발 눈빛?

파마 가장들이 고달프고 괴로운 하루를 보낼 수 있는 힘이 뭘까요? 그건 바로 가족들의 눈빛이에요. 힘들게 일을 마치고 돌아 왔을 때, 자신에게 향하고 있는 가족들의 애정 어린 눈빛. 그럴 때 가장들은 힘을 얻는 거예요.

단발 아! 그렇다면, 앞으로 그 눈빛을 더 열심히 보내주면 되겠네요?

파마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군요. 그건 그 사람들이 ‘일’을 할 때잖아요.

단발 …….

파마 지금은 일을 못 하고 있는 상태죠. 일을 못 구해서 미안하고 돈을 못 버니까 미안하고, 그런 가슴 아픈 상태에서 집에 들어왔는데 가족들이 애정 어린 눈빛을 보낸다고 생각해봐요. 어떻겠어요?

단발 (서서히 깨달음을 얻는다) 아아…….

파마 애들이 노래를 불렀을 때 그쪽 아저씨가 왜 대성통곡을 했는지 알겠죠?

단발 (깨달음) 이제야 알겠습니다. 스승님.

파마 그렇기 때문에 그 1단계가 바로 ‘눈빛 돌리기’ 인 거예요.

단발 눈빛 돌리기!

파마 시간이 없으니 바로 실전으로 들어가 봐요. 남편이 퇴근한 척하고 집에 들어왔어요. 대꾸를 해 보세요. “여보, 나 왔어.”

단발 (눈빛을 의도적으로 피하며) 으……응……별일 없었어?

파마 그렇게 어색하게 눈빛을 돌리면 의도적으로 피한다는 느낌이 바로 오잖아요.

단발 그렇네요.

파마 다시 한 번 해봐요. “여보, 나 왔어.”

단발 (처음부터 딴 데를 보며) 응, 별일 없었지?

파마 그렇게 처음부터 딴 데를 보면서 얘기하면 냉랭해져 있다는 느낌이 들잖아요.

단발 아아…… 어렵네요.

파마 눈빛을 피하되, 의도적이지도 냉랭하지도 않게 자연스러운 느낌으로 피해야 되는 거예요. 상상을 해봐요. 남편이 집에 왔을 때 눈빛을 돌리고 있을만한 자연스러운 무엇.

단발 자연스러운 무엇이라…….

파마 시범을 보여주죠. 역할을 바꿔 봐요.

단발 (남편 흉내) 여보, 나 왔어.

파마 (뒤돌아 요리하는 척) 왔어? 계란 사왔어?

단발 (계란 건네주는 척) 응, 여기.

파마 (계란 받자마자, 다른 곳으로 가며) 빨래가 다 됐나? 당신은 빨리 씻어.

단발 (씻으러 가는 척) 응, 그래. (씻으러 들어갔다 나온 듯) 다 씻었는데?

파마 (식탁을 가리키는 듯) 밥 차려놨어.

단발 당신은?

파마 당신 기다리다 배고파서 먹었어. 아이고, 내 정신? 드라마 녹화해 놨는데. (거실로 달려가는 시늉)

단발 (껄껄 웃는다) 허허 당신도 참! (편하게 밥을 먹는 시늉을 하다가) ……어머? 한 번도 안 마주쳤어요!

파마 그리고 자연스럽죠?

단발 남편 입장에서도 정말 자연스럽고 편하겠어요!

파마 이 1단계를 여러 가지로 조합해서 써먹으세요. 요리-빨래-드라마, 드라마-요리-빨래 같은 식으로. 여기서 중요한 건, 요리가 맨 마지막에 가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밥을 같이 먹게 되고, 같이 먹게 되면 눈이 마주치게 되니까.

단발 (경이로움) 스승님…….

파마 통닭 시키면, 꼭 우리 애들 불러줘요.

단발이 파마를 껴안는다.

암전. 암전을 감싸는 작은 멜로디.

#4

불이 켜지면, 꾸부정이 한 손에 비닐봉지를 들고 대머리를 기다리고 있다.

대머리가 생일 때 쓰는 고깔모자를 쓰고 천천히 걸어온다.

꾸부정 스승님!

대머리 (고깔모자가 부끄러운 듯) 오늘, 생일이거든요. 오늘 컨셉은 직원들이 해준 생일파티 컨셉입니다. 1년에 한번밖에 못 써먹는 게 아쉽긴 하지만…… (꾸부정의 상태를 보고) 좋아 보이는군요.

꾸부정 그럼요! 집사람이 완전히 속아 넘어갔습니다. 우연의 일치이긴 하지만 집에 갈 때마다 빨래를 하거나 요리를 하거나 드라마를 보고 있더라구요. 눈이 안 마주치니까 더더욱 마음이 편합니다. 하하하하!

대머리 참으로……대단한 우연의 일치로군요.

꾸부정 네?

대머리 아닙니다. 그런 우연이 겹칠 때가 있죠……저도 그랬으니까. 어쨌든 다행입니다.

꾸부정 (비닐봉지를 내밀며) 저어……이거…….

대머리 이건?

꾸부정 스승님 생신 선물입니다.

대머리 ……해고자들끼리는……경조사를 모른 척 하는 게 불문율인데…….

꾸부정 그건 알지만, 스승님의 생신이니까요. 자판기 커피를 서울역에서 영등포 쪽으로 옮기니까 50원이 절약되더라구요. 그걸 두 달 동안 모아서 산 겁니다.

대머리, 천천히 봉지를 열어본다. 그 안에는 소주 한 병이 들어있다.

꾸부정 한 달 치 회식 아이템입니다.

대머리 ……직원들도……챙겨준 적 없었는데……선물…….

꾸부정 ……약소합니다.

한동안 말없이, 소주병을 만지작거리는 대머리.

대머리 (분위기 전환) 흠흠, 두 달이 지났으니 2단계로 들어갈 차례로군요.

꾸부정 그 생각을 하니까 두근거려서 잠이 안 왔습니다.

대머리 배우고 익히면 때때로 즐겁지 아니하죠. (선물 받은 소주를 따서 권하며) 일단, 한 모금 하시죠.

꾸부정 하지만……이건 스승님의

대머리 오늘은 제 생일이니까 특별히 보름치만 마시죠 (오징어 다리 네 개를 꺼내며) 안주도 사치스럽게 1인당 무려 두 개씩.

소주병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맛있게 소주를 마시는 두 남자.

대머리 자본주의 사회에서 직장에 다니고 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가 뭐라 생각하십니까?

꾸부정 글쎄요, 명함?

대머리 (고개 흔든다)

꾸부정 그럼, 양복이나 작업복?

대머리 이렇게 물어보죠. 직장에 다니는 이유가 뭡니까? 자아실현 같은 뻔한 답 말고.

꾸부정 돈을 벌기 위해서죠. 돈을 벌어야 가족들 먹여 살리고 집도 사고.

대머리 그렇습니다. 돈, 바로 월급이죠. 직장을 다닌다는 가장 큰 증거는 바로 꼬박꼬박 나오는 월급입니다.

꾸부정 (이마를 치며) 아아 그렇구나.

대머리 선생이 그 어떤 실수나 튀는 행동을 하더라도 월급을 꼬박꼬박 가져다주는 한 쉽게 의심받지 않습니다. 1단계보다 더 강력한 2단계는 바로 ‘월급’입니다.

꾸부정 월급이라……무슨 수로 월급을…….

대머리 퇴직금과 저축과 비자금을 포함하면 얼마나 됩니까?

꾸부정 한……삼천 정도…….

대머리 적군요.

꾸부정 당겨쓰는 바람에…….

대머리 월급은?

꾸부정 이백이 조금…….

대머리 적군요.

꾸부정 성과급제 인지라…….

대머리 봅시다, 재취업의 목표를 일 년으로 잡았을 때, 총자본 삼천에서 하루 용돈 만원 곱하기 365해서 빼면 2635만원. 중간 중간 부인과 아이들 생일 선물 챙겨주고, 가끔 부모님 외식도 시켜드리고, 아프면 병원 가야되고, 친구 만나면 술 한잔도 해야 되니까 100만원 빼면 2535만원. 이걸 열두 달로 나누면 211. 25만원. 딱 맞아떨어지는군요.

꾸부정 이럴 수가! 이토록 맞아 떨어지다니!

대머리 아직 감탄은 일러요. 변수를 따져봅시다. 올해 안에 큰돈 들어갈 가능성이 있는 것들이 뭐가 있죠?

꾸부정 음……올해 봄에 어머니 금니를 해드리기로.

대머리 돈 더 모아서 내년에 임플란트 해드린다고 하세요.

꾸부정 음……올해 여름에 가족들하고 제주도를.

대머리 돈 더 모아서 내년에 하와이 가자고 하세요.

꾸부정 처제가 연애를 하는데 가을쯤 결혼하고 싶다고.

대머리 어떻게든 둘이 깨지게 만드세요.

꾸부정 겨울에 큰애가 수능을 보는데 그럼 대학 등록금을.

대머리 어떻게든 재수하게 만드세요.

꾸부정 이럴 수가! 이토록 쉽게 해결되다니! 선생님은 천재예요!

대머리 지금 당장, 은행으로 가서, 입금 하세요.

꾸부정, 대머리를 부둥켜안는다.

암전. 암전을 감싸는 작은 멜로디.

#5

불이 켜지면, 단발과 파마가 그네에 앉아있다. 단발은 통닭을, 파마는 장조림 통을 들고

있다. 그들의 발밑에는 반쯤 남은 소주병(남자들이 마신)이 남아있다.

단발 다 먹으면 살찐다고 애들한테 강제로 뺏어 온 통닭이에요.

파마 우리 애들 좋아하겠네. 이건 우리 엄마가 보내준 장조림이야.

단발 이 귀한 걸.

파마 미국산일 거야.

단발 찬밥 더운 밥 가릴 때가 아니죠.

두 여자, 웃는다.

단발 (소주병을 내려다보며) 회식을 보름치나 빠뜨려놓고 갔네요. 불쌍한 그이.

파마 남은 보름은 축구대회로 때우겠지. 모래판에 뒹굴고 있을 생각을 하니 가슴이 아파.

단발 이번 달엔 월급을 두 번이나 입금했더라구요.

파마 우리 아저씨는 실수로 우리 딸한테 입금한 적도 있어.

두 여자, 웃는다.

파마 월급날이니까 당당하게 들어오겠네. 오랜만에……하자고 할지도 몰라.

단발 어머, 스승님도.

파마 안 좋아도……좋은 척해 줘야지 뭐.

단발 난 그냥……좋은데.

파마 역시, 젊구나.

두 여자, 웃는다.

파마 (소주병 집으며) 이 회식 보름치는, 우리가 마시자구. 곗날이었다고 하지 뭐.

단발 곗날이라……짤린 지 1년 넘은 곗날.

파마 난 2년.

두 여자, 한참을 웃다가, 사이좋게 소주를 나눠 마신다.

파마 그 아저씨들…… 앞으로 1년 버티기도 간당간당할 거야. 퇴직금은 한계가 있지.

단발 우리 남편은…… 당겨썼을 텐데.

파마 중간에 큰돈 들어갈 일 있으면 알아서 짤라줘. 어머니 금니라든가 제주도로 떠나는 가족 여행이라든가 자식들 학자금이라든가 동생 결혼식 같은 것들 있잖아.

단발 어머? 어떻게 그렇게 잘 아세요?

파마 사는 게 비슷비슷하니까 돈 들어가는 것도 비슷비슷하겠지 뭐.

단발 정말이지……스승님은.

파마 대놓고 짜르면 의심하니까 자연스러워야 돼. 나 같은 경우는 뉴스를 많이 활용해. 요즘 뉴스에 경제 어렵다는 얘기 많이 나오잖아. 등록금에 목숨 끊고 효도 못 해 목숨 끊고 결혼 못 시켜줘서 목숨 끊고……그런 뉴스 나올 때마다 호들갑을 떠는 거야. “어머머머, 저걸 어떡해? 우리라고 안심하면 안 되겠네. 여보, 경제도 어려운데 당분간 허리띠 좀 졸라맵시다.” 그럼 남편이 그러겠지. “그래도……할 건 해야 되잖아?” 그럼 이러는 거지. “그거 안 한다고 당장 죽어? 다 내년에 합시다. 금니는 임플란트로, 제주도는 하와이로, 그리고 첫째 너는 조금만 더 공부하면 ‘인 서울’ 가능해. 그냥 재수해. 그리고 동생 결혼식은……으이그 나 그 남자 맘에 안 들어!”

두 여자, 배꼽을 잡다가, 다시 기분 좋게 마시는 소주.

파마 자기도…… 빨리 일을 구해야 돼.

단발 ……그래야죠.

파마 일을 구할 때도 튀지 말아야 돼. 집에만 있으니까 갑갑하다, 옆집 엄마들이 마트에 가서 일하니까 돈도 벌어 좋고 심심하지도 않아서 좋지 않느냐, 일도 엄청 편하다더라…… 물론 편하지는 않지……자존심도 많이 상하고…….

단발 …….

파마 그래도 마트를 구하면 다행이야. 술집을 돌면서 전병을 파는 아줌마들도 있어.

단발 …….

파마 더 심하면……도우미로 나서는 거지.

단발 …….

파마 남자들도 마찬가지야……일을 도저히 못 구하면 아빠방 같은 데로 가기도 하거든. 알지? 그, 남자 도우미 같은…….

단발 …….

파마 대단한 거야……그렇게 해서 가족이 유지되니까.

단발 대단하네요……저로서는 엄두도 못 낼…….

파마 더 지나면……엄두가 날 거야…….

단발 …….

파마 ‘뭐든’이라는 단어가 중요해. 뭐든.

단발 ……뭐든.

파마 2단계가 바로 그 ‘뭐든’ 이야.

단발 …….

파마 (벼룩시장을 건넨다) 생일 축하해. 선물이야.

단발 ……고마워요.

파마 꼼꼼히 읽어 보면 일을 구할 수 있을 거야. (소주병을 들고) 마시자고……곗날인데

말없이, 소주를 마시는 여자들.

암전. 암전을 감싸는 작은 멜로디.

#6

불이 켜지면, 꾸부정이 축구 유니폼 차림으로 모래판에 열심히 뒹굴고 있다. 잠시 후, 천천히 걸어 들어오는 대머리. 그러나, 대머리가 아니다. 윤기 흐르는 리젠트 헤어스타일에 삐까번쩍한 양복, 광나는 구두. 그러나, 왠지 어색한. 어찌 보면 우스꽝스러운.

꾸부정 스승님! …… 머리가?

대머리 가발입니다.

꾸부정 결혼식이라도?

대머리 (대답 없는 미소) ……이제, 완벽하게 홀로서기를 하셨군요.

꾸부정 스승님 덕분이죠……덕분에 집사람이 뒤로 자빠지지 않을 수 있게 되었네요.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지만, 어머니 금니도 가족들 여행도 다 내년으로 미뤄졌어요. 처제는 결혼 상대가 갑자기 마음에 안 들고 아들놈은 갑자기 ‘인 서울’을 노리겠다더군요. 4년제도 힘든 놈이…….

대머리 그건 정말로……완벽한 행운이군요.

꾸부정 예……그야말로 완벽한…….

대머리 …….

꾸부정 집사람이 일을 시작했어요. 집에만 있으니까 심심하다면서.

대머리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겠군요.

꾸부정 전병을 팔고 있더라구요……술집을 돌아다니면서.

대머리 …….

꾸부정 심심하다고 할 만할 일일까요……전병을 파는 게…….

대머리 …….

꾸부정 ……심심해서겠죠……분명…….

좋은 건지, 씁쓸한 건지 모를 미묘한 미소를 지으며 그네를 타는 두 남자.

대머리 마지막 3단계를 배울 차례로군요. (양주를 꺼낸다) 양주 한잔 하시죠.

꾸부정 양주가……어디서?

대머리 (대답 없는 미소) 졸업 선물입니다.

어떠한 영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양주를 받아 마시는 꾸부정.

대머리 3단계는 ……시간입니다.

꾸부정 ……시간.

대머리, 그네에서 일어나 놀이터를 천천히 거닌다.

대머리 어릴 때 놀이터에서 소꿉놀이를 하면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꾸부정 …….

대머리 의사도 됐다가 선생님도 됐다가 과학자, 대통령, 경찰관, 소방관, 백화점 사장, 옷가게 사장, 슈퍼마켓 사장……그렇게 소꿉놀이를 하면 정말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시간이 더 많으면 나는 더 많이 놀 수 있을 텐데, 이렇게 생각했죠. 시간이 많다는 게 그렇게 좋지만은 않다는 걸……이제야 깨닫게 되는군요.

꾸부정 …….

대머리 선생님이 해고된 순간부터 선생님에게는 엄청난 시간이 생겼습니다. 이제 선생님은 직장을 구할 때까지 평범함을 연기하기 위해서 엄청난 양의 시간과 싸워야 합니다. 늦잠을 잘 수 없습니다. 출근 하는 척해야 되니까요. 밖에서 시간을 때워야 합니다. 퇴근 시간이 되어야 집에 갈 수 있으니까요. 밥도 혼자 먹어야 됩니다. 다른 사람들은 직장에서 먹으니까요. 비싼 걸 먹으면 안 됩니다. 돈이 없으니까요.

꾸부정 …….

대머리 동네 주변에 있으면 안 됩니다. 아는 사람을 만날 수도 있으니까요. 극장도 있고 피씨방도 있고 커피숍도 있지만 갈 수 없습니다. 돈이 드니까요. 아침이 되면 꾸역꾸역 밖으로 나가서 저녁이 될 때까지 아는 사람 없는 곳에서 돈 안 드는 방법을 택해서 시간을 죽여야 됩니다. 시간이 많다고 책을 읽어서도 안 됩니다. 취직을 위해서 교차로 벼룩시장 가로수만 죽어라 읽고 읽고 또 읽어야 합니다. 매일매일 그런 시간과 싸워야 됩니다. 그게……마지막 3단계입니다.

꾸부정 …….

대머리 (놀이터를 둘러 본 후) 어릴 때는 이 놀이터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았지만 이제는 그럴 수도 없습니다. 놀이터에서 대머리의 어른이 미끄럼틀을 타고 있으면 웃기잖아요……어른이니까…….

꾸부정 …….

대머리 (시계를 본다) 이제 가야겠군요. 저도 오늘은 축구대회라고 한지라 …….

대머리, 가발을 벗고, 비까번쩍한 양복을 벗으면, 그 안에 입혀져 있는 유니폼.

그 상태로 모래바닥에 사정없이 뒹굴고, 꾸부정도 말없이 뒹굴고.

꾸부정 (뒹굴면서) 스승님……우리…… 소꿉놀이 한다고 생각하면 되겠죠? 어릴 때처럼?

대머리 (역시 뒹굴면서) 우리 같은 중년의 가장에겐……조금은 괴로운 소꿉놀이군요. 그런데……어릴 때 소꿉놀이 할 때는 왜 한번도……회사원 역할을 안 했을까요.

꾸부정 …….

대머리 시시해서였을까요?

꾸부정, 말없이 더욱 열심히 뒹굴고, 대머리도 그런 꾸부정을 보며 더더욱 열심히

뒹굴고…….

암전.

잠시 후 들려오는 초인종 소리. 그리고, 동시에 들려오는 두 남자의 목소리.

목소리 나 왔어…… 별일은 무슨…… (심호흡을 한번 하고) 뭐, 똑같지 뭐.

작은 멜로디.

-막-
2011-01-03 3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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